서재필은 1864 년 1 월 7 일 외가인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서광효의 둘째아들로 출생하여 6세경까지 이곳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 후 자식이 없던 7촌 서광하의 양자로 들어가 충남 대덕에서 잠시 살았다. 7세경 그는 서울에 있는 외숙부인 김성근의 집으로 공부하러 가 1882년 23명의 합격자 중 최연소로 병과 3등으로 급제하였다.
서재필은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일찍이 개화파의 거두인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 서광범 등과 교류하면서 개화에 눈을 떴다. 이후 그는 김옥균의 제의를 받고, 문관의 길을 마다하고 1883년 5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토야마(戶山)육군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이듬에 7월까지 신식 군사지식과 기술을 배웠다.
일본 유학을 통해 급진적인 개화·혁신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과 함께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군을 앞세운 수구파의 무력공격으로 3일천하에 끝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정변의 실패로 서재필은 역적으로 낙인 찍혔고 그의 부모와 처, 형은 음독 자살하였으며,두 살 된 어린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어 죽었고, 동생 재창은 체포되어 참형되는 불행을 겪었다.
일본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188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이후 미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전개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저녁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이 때 가지게 된 그의 기독교 신앙은 이후 그의 사상 혀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재필은 교회에서 탄광을 경영하는 사업가이자 교육가인 홀렌백을 알게 되어 그의 호의로 윌커스 베리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 후 그는 미육군 군의감도서관에서 중국.일본의 의학 관련 책을 번역.정리하는 사서 일을 하였다.그러던 중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889년 콜럼비아대학 (현조지워싱턴대악교의 전신) 의학부에 입학해 1892년 3월 소정의 과정을 마쳐 한국인 최초의 의학사 (M.D)가 되었다. 그는 학창생활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실질적인 체험과 지식을 축적시켰는데 이러한 경험은 귀국 후 국내 활동의 전반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국내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와 진동을 겪고 있었다. 1894년 수립된 갑오정권은 서재필에게 씌워졌던 역적의 죄명을 벗게 해 주었고 귀국을 요청하였다. 이에 서재필은 한국 땅에 선진사상을 심어 정치.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목적을 갖고 미침내 1895년 12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공식적으로 중추원 고문직을 맡았으나 실제로는 개화운동의 선구자로 민중계몽사업에 심혈을 이울였다. 그는 귀국 직후부터 정계와 관계의 인사들과 외국 사절들, 여타의 개혁의지를 가진 인사들과 차례로 접촉하면서 자신의 활동 기반을 다지는 한편, 한국 최초의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배재학당에 나가 세계정세를 가르치고 협성회를 조직해 학생들에게 민주적인 토록문화를 지도하며 선진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무엇보다 그는 최초의 한글신문이자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간행해 한국의 정치. 사회발전을 위한 노력에 온 힘을 쏟았다. 또 독립협회를 조직해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립하였고 토론회와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자주자강의 개혁운동을 추진했다.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한 서재필의 개혁. 계몽운동은 점차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게 되었고 일본과 러시아는 배후 인물로 서재필을 지목하고 추방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한제국정부의 수구세력을 움직였고 서재필은 결국 1898년 5월 14일 조국을 떠나게 되었다.
서재필이 한국에서 시작한 계몽운동은 당시 봉건적 잔재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던 한국사회에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주의의 씨를 뿌려놓은 것으로 한국 민중의 잠재의식을 일깨운 선각자적인 활동이었다. 그가 뿌린 씨앗은 10년 후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가,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