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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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한국 근대사에는 꺼져가는 국운에 맞서 온몸과 마음을 바친 민족의 지도자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암울했던 우리 민족에게 한 가닥의 등불이 되어 민중을 계몽하여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자주독립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이 가운데 서재필은 우리 근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인물로 그의 생애와 활동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역사의 거울이 된다.
송재(松齋) 서재필(1864~1951)은 구한말 격동기에서 해방 정국의 격동기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우리 근대사에 역사의 증인으로 살았다. 개항 이후 밀어닥친 회세의 침탈에 맞서 개화의식을 배양해 갑신혁명을 단행한 것을 비롯하여, '독립신문' '독립협회'를 통한 자주자강의 계몽운동, '제1차 한인회의' 개최와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 한국친우회 결성 및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 정국에서 보여준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한 노력 등은 그가 일생동안 품어왔던 근대적인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향한 희생과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서재필의 생애는 오늘날 안일하게 생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는 한편,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고국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그는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선 개척자의 삶, 독립운동으로 인해 사업이 피폐된 이후 62세의 나이에 다시 의학을 공부해 의사의 길을 걷는 만년의 삶 등은 어떠한 환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는 불굴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자신도 회상하기를, "젊은 시절 훌륭한 뜻을 갖고 있었으나, 모든 일을 너무나 성급히 서둘러서 본래의 훌륭한 목적을 잃어버리고 비참한 실패를 하였다고"고 말한 뒤, "그 결과 나는 고귀한 목적을 저버리지 않고 그것을 달성하고자 노력함에 있어서 매일 주어진 일을 하나하나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고 하였다. 이같ㅇ은 그의 굳은 신조는 쓰라린 실패와 형극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II

   서재필은 1864 년 1 월 7 일 외가인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서광효의 둘째아들로 출생하여 6세경까지 이곳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 후 자식이 없던 7촌 서광하의 양자로 들어가 충남 대덕에서 잠시 살았다. 7세경 그는 서울에 있는 외숙부인 김성근의 집으로 공부하러 가 1882년 23명의 합격자 중 최연소로 병과 3등으로 급제하였다.

   

   서재필은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일찍이 개화파의 거두인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 서광범 등과 교류하면서 개화에 눈을 떴다. 이후 그는 김옥균의 제의를 받고, 문관의 길을 마다하고 1883 5월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토야마(戶山)육군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이듬에 7월까지 신식 군사지식과 기술을 배웠다.


   일본 유학을 통해 급진적인 개화·혁신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과 함께 1884 12 4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군을 앞세운 수구파의 무력공격으로 3일천하에 끝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정변의 실패로 서재필은 역적으로 낙인 찍혔고 그의 부모와 처, 형은 음독 자살하였으며,두 살 된 어린 아들은 돌보는 이가 없어 굶어 죽어 죽었고, 동생 재창은 체포되어 참형되는 불행을 겪었다.


일본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미국 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1885 4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이후 미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전개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저녁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다. 이 때 가지게 된 그의 기독교 신앙은 이후 그의 사상 혀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재필은 교회에서 탄광을 경영하는 사업가이자 교육가인 홀렌백을 알게 되어 그의 호의로 윌커스 베리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그 후 그는 미육군 군의감도서관에서 중국.일본의 의학 관련 책을 번역.정리하는 사서 일을 하였다.그러던 중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889년 콜럼비아대학 (현조지워싱턴대악교의 전신) 의학부에 입학해 1892 3월 소정의 과정을 마쳐 한국인 최초의 의학사 (M.D)가 되었다. 그는 학창생활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실질적인 체험과 지식을 축적시켰는데 이러한 경험은 귀국 후 국내 활동의 전반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국내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와 진동을 겪고 있었다. 1894년 수립된 갑오정권은 서재필에게 씌워졌던 역적의 죄명을 벗게 해 주었고 귀국을 요청하였다. 이에 서재필은 한국 땅에 선진사상을 심어 정치.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목적을 갖고 미침내 1895 12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공식적으로 중추원 고문직을 맡았으나 실제로는 개화운동의 선구자로 민중계몽사업에 심혈을 이울였다. 그는 귀국 직후부터 정계와 관계의 인사들과 외국 사절들, 여타의 개혁의지를 가진 인사들과 차례로 접촉하면서 자신의 활동 기반을 다지는 한편, 한국 최초의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배재학당에 나가 세계정세를 가르치고 협성회를 조직해 학생들에게 민주적인 토록문화를 지도하며 선진의식을 일깨워 주었다. 무엇보다 그는 최초의 한글신문이자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을 간행해 한국의 정치. 사회발전을 위한 노력에 온 힘을 쏟았다. 또 독립협회를 조직해 독립문과 독립관을 건립하였고 토론회와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자주자강의 개혁운동을 추진했다.


    자주독립과 부국강병을 위한 서재필의 개혁. 계몽운동은 점차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게 되었고 일본과 러시아는 배후 인물로 서재필을 지목하고 추방공작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한제국정부의 수구세력을 움직였고 서재필은 결국 1898 5 14일 조국을 떠나게 되었다.


   서재필이 한국에서 시작한 계몽운동은 당시 봉건적 잔재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던 한국사회에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주의의 씨를 뿌려놓은 것으로 한국 민중의 잠재의식을 일깨운 선각자적인 활동이었다. 그가 뿌린 씨앗은 10년 후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가,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III

   서재필은미국에 건너간 이후 3.1운동 전까지 개인사업에 전념하였다. 그는 1904년부터 1924년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인쇄 및 문방구점을 경영하는 사업을 운영,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기는 이승만, 윤병구, 여운홍, 안창호 등 국내외의 애국지사들과 계속적으로 교류하면서 기회가 오면 언제라도 독립운동의 일선에 뛰어들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사조와 정의.인도의 기운이 국제성세를 지배하자, 서재필은 1918 12월 대한인국민호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영문잡지의 발간을 제의했다. 영문잡지를 통해 일제의 불법적인 한국 지배를 알리는 노력을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재정 문제로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서재필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3.1 운동 직후부터 1922년까지 서재필은 4년여 동안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일본의 잔학성을 고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수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이승만. 정한경 등과 필라델피아에서 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여 3.1 운동으로 나타난 한국 독립의 열망과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이상을 만방에 알렸다. 그는 새로 설립한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를 통해 Korea Review를 비롯한 다양한 선전용 책자를 발간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와 함께 서재필은 직접 미국 각 지역을 돌면서 미국 시민을 상대로 한 강연활동을 전개하며 친한여론을 형성시켰다. 또 미국인의 중심이 된 한국친우회를 미국 전역 21곳에 결성하여 미국 의회와 언론, 그리고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한국의 독립을 동정하며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한국친우회는 영국과 프랑스에도 각각 설립되어 한국의 독립문제가 국제 여론화되는데 이바지하였다.


   서재필은 1921 11월에 시작된 워싱턴군축회의에 이승만, 정한경과 함께 한국대표단의 일원이 되어 활발한 독립외교를 추진하였다. 이러한 그의 활동은 당시 분열되어 독립운동이 침체되어 있던 민주한인사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그리고 국내외의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열기를 불러일으키는데 기여하였다. 이후 서재필은 1925 7월 화와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에 신흥우.송진우 등과 한국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제기하며 적극적인 대외활동을 전개했다.


   서재필은 1925 4월부터 잠시 유일한과 사업을 시작했으나 다시 의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926 9월 펜실베니아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해 20년 이상 떠나 있던 의사의 길로 복귀하였다. 의학을 연구하며 의사로서 분주하게 지내는 동안 그는 동아일보” , “조선일보”, “신한민보등에 수많은 글을 기고해 국내외 한국인들에게 자주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IV

   해방이 되자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이 김규식의 의견을 받아들여 서재필을 미군정청 수석고문으로 초빙하자 서재필은 1947 7 1 83세의 나이로 고국을 방문했다. 조국을 떠난 지 49년 만의 환국이었다. 그는 1948 9월 까지 한국에 머물면서 라디오 방송과 강견, 각종 면담과 저술 등을 통해 통일된 근대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위해 노력하고 해방정국을 정돈시키는데 역량을 집중하였다. 이런 중에 정인과.최능진 등 국내의 주요 인사들이 서재필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를 대통령 후보루 추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자신으로 인해 정치적 혼란이 생기는 일을 원치 않은데다 미국시민으로 남아 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함으로서서 이들의 추대운동에 반대했다. 이승만을 초대대통령으로 하는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그는 자신의 역할의 끝났다고 판단하고 1948 9 11일 한국을 떠났다.


   서재필이 한국을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당부는 다음과 같다.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며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평생의 소원이다.”


 


   서재필은 6.25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1 1 5일 필라델피아 근교 노리스타운에 있는 몽고메리병원에서 곡절 많았던 풍운의 한생애를 마쳤다. 그의 나이 87세였다. 서재필의 파란만장한 삶은 한국근대사에 개화.혁신의 선봉장이자 민중계몽의 선각자, 근대민족의 지도자로서 불멸의 족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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